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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는 일상의 틈새에 끼어든 달팽이의 움직임이 관찰된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곳은 시멘트 바닥이다. 그곳은 ‘보는 화자’가 하루종일 갇혀 사는 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처음에 보이는 대상에 머물러 있던 달팽이는 어느덧 ‘보는 화자’의 내면과 동일시될 상황에 놓인 게 된다. 오체투지로 이동하는 달팽이는 들어줄 사람 없는데 말을 하고 있는 화자 모습과 다를 바 없다. 혼자 하는 말이라 말수가 줄고 말투는 느린 화자의 말은 곧 달팽이의 온몸 바친 보행이 되는 거다. 들어줄 대상이 없어 말라 버린 화자의 말들은 달팽이의 체액이 “말라 버리는 극한의 생략”이 된다. 아무리 말해도 대상이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달팽이가 남긴 “절명의 발자국”과 같은 것. 달팽이의 맨살 걸음은 그러니까 화자의 삶이자 나아가 이주 한인의 삶이며 모국어를 쓸 수 없는 땅에 와 사는 디아스포라 시인의 삶이다. 디아스포라 시인의 삶이라는 윤석훈 시의 자아는 이렇듯 뚜렷하게 달팽이가 ‘절명의 발자국’을 남기면서도 ‘유유히 속도를 내는’ 모양으로 대상화되어 있다.


시 해설: 박덕규
(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