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07_10;16;05.jpg


+ 네 켤레의 신발

오늘 저 나직한 지붕 아래서
코와 눈매가 닮은 식구들이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은
얼마나 따뜻한가

늘 만져서 반짝이는 찻잔, 잘 닦은 마룻바닥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소리 내는 창문 안에서
이제 스무 해를 함께 산 부부가 식탁에 앉아
안나 카레리나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가 긴 휘파람으로 불어왔는지, 커튼 안까지 달려온 별빛으로
이마까지 덮은 아들의 머리카락 수를 헬 수 있는
밤은 얼마나 아늑한가

시금치와 배추 반 단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의 전화번호를
마음으로 외는 시간이란 얼마나 넉넉한가
흙이 묻어도 정겨운, 함께 놓이면 그것이 곧 가족이고 식구인
네 켤레의 신발
(이기철·시인, 1943-)


+ 가정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박목월·시인, 1916-1978)


+ 아버지의 마음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김현승·시인, 1913-1975)


+ 어머니는 가정의 정원사

늘 자식 걱정에
수심이 깊으시던 어머니 얼굴

생활에 여유가 생겨
삶의 고통이 잦아지기 시작했을 때
어머니의 얼굴과 손등엔 주름살이
허리도 구부정하게 되셨습니다

살기 힘든 세상일지라도
아들아! 잘 이겨내라
너만 믿는다
나의 아들아! 하시는 어머니
때로는 아무 말 하시지 않아도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만 같습니다

어머니의 아들이 시인이 되어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시고 가꾸어 주시는
가정의 정원사이십니다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시기 바랍니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햇빛 좋은 날

엄마가 널어놓은
베란다 건조대 위의
촘촘한 빨래들.

아빠 와이셔츠 어깨에
내 런닝 팔이 슬며시 기대어 있고
형 티셔츠에 내 한쪽 양말이
마치 형 배 위에 올려놓고 자는
내 무엄한 발처럼 느긋이 얹혀있다.
엄마 반바지에 내가 묻혀놓은
파란 잉크펜 자국.

건조대 위에서
보송보송 마르는
촘촘한 빨래들.
빨래 마르는 것만 봐도 안다.
햇빛 좋은 날의
우리 가족.
(권영상·아동문학가, 1953-)


+ 식구

매일 함께 하는 식구들 얼굴에서
삼시 세끼 대하는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때마다 비슷한 변변치 않은 반찬에서
새로이 찾아내는 맛이 있다.

간장에 절인 깻잎 젓가락으로 잡는데
두 장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다시금 놓자니 눈치가 보이고
한번에 먹자니 입 속이 먼저 짜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나머지 한 장을 떼어내어 주려고
젓가락 몇 쌍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이런 게 식구이겠거니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내 식구들의 얼굴이겠거니
(유병록·시인, 1982-)

+ 집

비바람 막아주는 지붕,
지붕을 받치고 있는 네 벽,
네 벽을 잡아주는 땅
그렇게 모여서 집이 됩니다.

따로 떨어지지 않고,
서로 마주보고 감싸 안아
한 집이 됩니다.
아늑한 집이 됩니다.  
(강지인·아동문학가)


+ 둥근 우리 집

내 생일날
피자 한 판 시켰다.

열어보고
또 열어봐도

일하러 간
우리 아버지
아직 안 오신다.

형의 배가 꼬로록
나는 침이 꼴깍
그래도 보기만 하고 참는다.

다섯 조각
모두 모여야
피자 한 판

아버지 오셔야
다섯 식구
피자같이 둥글게 되지.
(안영선·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