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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갑 선교사 / 12월 15일 은혜의 말씀입니다.
영원한 위로
눅 2:25-28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너무도 무겁고 암울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던 아리마데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막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아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이 기다렸던 그 ‘이스라엘의 위로’는 무엇이었을까요? 보통 일반적으로 말하는 ‘위로(comfort)’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따뜻한 격려를 해줄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25절을 번역한 모든 영어 성경(NIV, ASV, RSV, KJV)들은 그 ‘위로’라는 단어를 한결같이 ‘Consolation’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Consolation’은 병들었을 때 필요한, 돈이 없을 때 필요한, 사업이 망했을 때 필요한, 속상했을 때 필요한 그런 보통 위로(comfort)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나 부모를 갑자기 잃게 되어 깊은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매우 특별한 격려를 말합니다. 예레미야 16:7절에서 언급된 위로가 바로 Consolation입니다. “슬플 때에 떡을 떼며, 그 죽은 자를 인하여 그들을 위로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그들의 아비나 어미의 죽음을 위하여 위로의 잔을 그들에게 마시게 할 자가 없으리라.”
시므온이 기다렸던 위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 보통의 위로(comfort)가 아니라, 사망선고를 당한 이스라엘을 위한 특별한 위로(Consolation)였습니다. 헬라어로는 이 ‘위로’를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라고 했는데, “쓰러져 있는 사람을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며, 다시 힘내라고 격려”를 해줄 때 하는 위로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그런 위로가 필요했던 것은 이스라엘의 상태가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주변 강대국(헬라제국, 로마제국)들에게 침략과 노략질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암울했던 상황은 영적으로 이스라엘은 사망선고를 당한 상태였습니다. 선지자 말라기 이후부터 약 400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계셨습니다. 선지자 아모스가 예언했던 그 캄캄한 시대를 겪고 있었습니다. 아모스 8:11-12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 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길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 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라.”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렸던 위로는 예레미야 31:10-14절에 있는 위로였을지도 모릅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런데 시므온이 기다렸던 위로는 그런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시므온의 모습을 좀 더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7-28절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유럽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에게 임했던 ‘이스라엘의 위로’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므온의 팔에 누가 있었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성령께서 시므온의 팔에 누구를 안겨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시므온이 평생 기도하며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위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많은 격려의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한 ‘이스라엘의 위로’이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31장에 있는 위로는 ‘임시적인 위로’라고 하면, 시므온에게 안겨진 아기 예수님은 “영원한 위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영원한 위로’가 우리 가운데 늘 충만히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6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지금의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위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위로]가 되는 예수님을 그들이 죽였고, 지금까지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지금도 비극 그 자체입니다.
다윗 왕조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솔로몬 이후에 나라만 남북으로 분열(BC 930년)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까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무너지는 역사를 거듭했습니다. 세우면 무너지고, 세우면 또 무너졌습니다. 앗시리아 제국이 일어나 북왕국 이스라엘를 무너트렸습니다. (BC 722년) 바벨론 제국이 일어나 남왕국 유다를 무너트렸습니다. (BC 586년) 그리고 70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바벨론 포로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이 바벨론 제국을 정복하고 고레스가 왕이 되었을 때 바벨론에 있던 유대인들이 본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어 느헤미야와 함께 나라를 재건했습니다. (BC 444년) 그러나 그 예루살렘도 다시 헬라제국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을 당했습니다. (BC 334년) 그리고 다시 로마제국 폼페이(Pompeyus) 장군에게 점령을 당했습니다. (BC 64년)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위로’를 그들 스스로가 차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승천 이후, AD 66년에 로마제국을 향한 유대인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그 폭동을 진압했던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은 폭도들만 진압했던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파괴시켜 버렸고,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완전히 지워버립니다. (AD 70년) 예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 24:2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그리고 약 1,878년 동안 나라 없이 살던 유대인들은 1948년 5월 14일에 팔레스타인 땅에 다시 그들의 국기를 꽂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평화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현재도 예루살렘은 “중동의 화약고”가 되어 있습니다. 그 땅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영원한 위로”가 무엇인지, 그 분이 누구이신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시므온과 안나를 주목합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수 십 년 동안 기도하면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사람들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기다렸던 것은 로마제국에게 점령당한 이스라엘의 재건이 아니었습니다. 온 열방 민족을 구원하실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소원대로 그들이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볼 수 있도록, 아니 그 메시야를 친히 안아볼 수 있도록 성령께서 그들을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마지막으로 이사야 66:10-12절을 읽습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성탄절입니다. 사람들과 모여서 기뻐하는 날이 아닙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와 함께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영원한 위로(αἰωνίαν παράκλησις : Everlasting Consolation)”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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