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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갑 선교사 - 10월 5일 은혜의 말씀
요나서 5장
요나 4:10-11
요나는 갈릴리 근방에서 출생한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니느웨(Nineveh) 선교를 위해서 갑자기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전에 이미 북왕국에서 선지자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왕하 14:25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가운데 언급된 ‘가드헤벨’은 요나의 고향으로 나사렛과 갈릴리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 요나가 활동했던 시기는 여로보암 왕(BC 793-753) 때였습니다. 그 동시대에 북왕국에는 요나와 함께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가 있었고, 남왕국에는 이사야와 미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쪽과 북쪽에 그처럼 위대한 선지자들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요나를 해외 선교사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어디로 가라고요? 니느웨요? 저는 안 갑니다. 다른 선지자를 보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거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름 ‘요나’의 뜻은 ‘비둘기’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품과 행동은 ‘하이에나’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동쪽 니느웨(지금의 이라크) 대신에 반대편 서쪽 다시스(지금의 스페인) 행 배에 승선했습니다. 역주행을 한 것입니다. 역주행에는 반드시 사고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다시스를 택했던 것은 니느웨가 싫었던 것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시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아담처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숨는다고 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중해의 거친 파도를 가로질러 스페인까지 가는 배는 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큰 배 안에는 그가 숨을 수 있는 곳이 많았습니다. 요나는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난 파도를 일으켜 배 밑창에 달라 붙어있던 요나를 배 선상(船上) 위로 홀짝 끌어올린 후에 곧바로 바다 속으로 던져버리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떨고 있는 요나를 봐야 합니다. 차가운 바다 물속에서 떨고 있는 요나가 아니라, 거대한 물고기 뱃속에서 떨고 있는 요나를 봐야 합니다. 깊은 바다 속에서 아니 컴컴한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숨을 쉬면서 살아있다는 사실을 요나는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이에나’ 요나가 ‘비둘기’ 요나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습니다. “내 생명이 서서히 사라져 갈 때, 내가 다시 한번 여호와를 생각하며 기도하였더니 성전에 계시는 주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나는 감사의 노래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내가 서약한 것을 지키겠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욘 2:7, 9 현대인성경)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큰 물고기가 요나를 해변에 토해 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한들 과연 몇 사람이나 그의 말을 믿어주었을까요? 요나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요나서를 읽은 사람들 중에는 그 일을 웃기는 만화책의 한 이야기 정도로 취급해 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던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런 놀림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육지에만 계시지 않고, 깊은 바다 속에도 계십니다. 홍해를 쪼개셨던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요단강을 찢으셨던 분도 여호수아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사람이 꾸며낸 우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적 펙트(fact)였습니다. 요나를 해변으로 밀어냈던 것은 큰 물고기였지만, 요나를 니느웨로 밀어냈던 것은 바로 그 역사적 펙트였습니다. 요나로서는 부인할 수 없는, 부정할 수도 없는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였고, 하나님의 능력이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서약한 것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그 먼 길을 걸어서 니느웨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나는 니느웨로 가까이 다가가면서 다시 사나운 하이에나가 되어갔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는 니느웨 성이 눈에 들어오면서 한 조각씩, 한 조각씩 깨지면서 땅에 떨어졌습니다. 결국 니느웨 성에 도착했을 때, 요나는 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니느웨 성을 돌려면 3일이 걸린다고 했습니다.(욘 3:3) 그런데 그는 단 하루만 돌았습니다.(4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대충 처리했다는 뜻이었습니다. 미움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까지 그처럼 토막을 쳐서 등 뒤로 던져버리게 했던 것입니다.
기도원에서 10일 금식, 20일 금식, 30일 금식, 40일 금식 기도를 하게 되면 모두 순한 비둘기들이 됩니다. 그런데 금식 기도를 마치고 하산해서 시간이 조금 흘러가면 다시 하이에나들이 되어가는 우리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요나는 그의 메시지를 듣고 니느웨 왕(王)부터 금식하며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더욱이 그들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의중을 확인했을 때 그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4장 1절은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라고 했습니다. 그가 누구를 싫어했고, 누구에게 화를 냈다는 말입니까? 앞뒤 문장을 보면 그 대상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지금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었습니다. 하이에나가 되어버린 요나는 다시 비둘기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세 번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죽어가는 놈을 살려주었더니 도리어 살려준 분에게 “왜 나를 살리셨습니까? 나를 죽이십시오. 그들을 살리실 것이면 나부터 죽이십시오.”라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 4:10-11) 이 말씀을 듣고 요나는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그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아니 그의 대답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나서는 그의 대답이 없이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던 말씀으로 끝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요나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다음 페이지를 넘겨봐도 요나서 5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대답이 없이 끝난 바로 거기서 부터가 요나서의 진정한 하이라이트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요나서가 기록되도록 하셨을까요? 요나서가 왜 성서가 되도록 하셨을까요? 요나서는 누구에게는 재미있는 혹은 누구에게는 재미없는 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서는 소선지서 12권 중에 하나였습니다. 즉 예언서였다는 말입니다. 예언서란 요나라고 하는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아니라, 요나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 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요나서 1장에서 4장까지 읽어보면 요나는 매우 시끄럽고 수선스럽고,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추측이 가능해 집니다. 느니웨 선교를 하루 만에 마친 요나는 분명히 북왕국으로 돌아가 니느웨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함구(緘口)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북왕국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방인 니느웨 사람들을 통째로 구원해 주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을 향해서 요나처럼 부들부들 떨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이에나로 “변했던” 요나는 곧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적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북왕국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열(10) 지파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모두 잊어버리고, 영적 하이에나로 “변하여” 더러운 우상들을 섬기고,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선민 백성이라 자칭하는 그들에게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에게 즉 그들이 설령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 이어 또 한 사람을 북왕국에 세우셨습니다. 바로 호세아였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게 하셨습니다. 북왕국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를 범하고 있는지 호세아를 통해서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도 북왕국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최종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 나가!” 그 말씀대로 요나가 니느웨를 다녀온 이후 약 20년 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바로 그 니느웨 사람들(앗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 세계무대에서 아웃(out)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BC 722년)
그러므로 우리까지 요나의 이야기를 비현실인 이야기로 취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요나서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뼈 속 깊이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아웃(out)될 수 있습니다. 요나서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종말론적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 말씀이었고, 북왕국 사람들에게는 회개하지 않으면 아웃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딴 금메달이 아닙니다. 내 공로 없이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그것을 평생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고난과 슬픔과 역경과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잘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 “나는 뭡니까? 왜 불교 신자들은 잘 되고, 하나님을 믿는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하나님을 향해서 소리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이에나’ 요나가 되지 마십시오. ‘비둘기’ 요나가 되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요나서 5장]을 써내려가는 멋진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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