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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갑 선교사 - 11월 11일 은혜의 말씀
최악이 최악이 아닙니다.
단 6:1-10
추수감사절입니다. 늘 감사해야 하지만, 더 감사를 드려야만 하는 계절이 온 것입니다. 농부들에게는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고, 한 해를 결산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농부는 아니지만, 나는 올해 무엇을 심었고, 무엇을 맺었고,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는지 뒤돌아 보았습니다. 떨어진 낙엽들이 수북이 쌓인 길을 걸으며 내 삶도 떨어지는 저 낙엽들처럼 허투루 살지는 않았나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저에게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에게도 힘들었던 한 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내의 간병을 위해서 한 달 정도 서울에 머물 예정으로 입국했었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선교지로 돌아가지 못한 채 발목이 묶여 있으리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희를 서울 기도원에 묶어 주신 은혜였다고 생각하니 더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가을이 지고,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만나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다니엘이 생각났습니다. 그의 생애에서 [감사]라는 단어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기쁜 마음으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 6:10절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때 다니엘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다니엘은 히브리 포로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다니엘은 왕의 총예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음 왕 벨사살 때는 벽에 쓰인 글자들을 해석해 줌으로써 벨사살은 다니엘에게 세 번째 서열에 해당하는 높은 자리를 주었습니다. 그 다음 왕 다리오는 영토가 확장되면서 총리를 세 명 임명했는데 다니엘의 민첩함과 지혜를 보고 그에게 제일 높은 수석 총리 자리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바벨론 총리들과 고관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금령을 만들어 왕에게 가지고 갔고, 왕은 그 금령에 인장을 찍었습니다. 그 금령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법률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나이다.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것입니다.”(단 6:7)
단 6:10절을 이미 읽었듯이, 다니엘은 그 금령에 왕의 인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던 대로” “늘 하던 대로” “날마다 하던 대로” “어제처럼 하던 대로” 윗방으로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자 굴’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음’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흔들림 없이 꿋꿋이 행했던 일은 ‘하던 대로’ 했던 일을 할 뿐이었습니다. [오늘]이 그가 하던 일의 마지막 날이 될지라도 다니엘은 어제처럼 늘 하던 대로 오늘도 그렇게 행했던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답답한 바보”라는 조롱을 받기에 충분했었습니다. 악한 자들은 사람을 죽일 때, 죽이는 일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즐기려고 합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그들이 파놓은 사자굴 속에서 다니엘이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짜릿한 희열을 느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들에게 그 즐거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단호했던 다니엘의 결심에 대해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조국, 유다는 이미 멸망하고 세상에 없었습니다. 노예가 된 그를 바벨론에서 구출해 줄 수 있는 왕도, 군대도, 특수요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벨론의 왕들 밑에서 총리직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출세(出世)라고 하면 대단한 출세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던 것입니다. 총리 자리에서 내려오는 위기가 아니라, 목숨을 잃게 되는 위기였습니다. 사퇴, 퇴출, 경질, 해임은 그의 자리만 비워주면 됩니다. 그러나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은 그의 목숨을 잃는 일이었습니다.
다니엘 앞에 꿀단지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30일”이란 꿀단지였습니다. 그들이 만든 금령에는 “30일 동안”이란 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무너진 조국의 재건을 위해서, 바벨론으로 잡혀 온 히브리 동족을 지켜주기 위해서 그가 매일 해 왔던 기도를 “30일”만 중단하겠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30일만 참았다가, 그 기간이 해제되면 30일 동안 하지 못했던 기도를 하루에 세 번이 아니라 30번으로 늘려서 할 수도 있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가서 “기도가 무엇이기에 총리직을 버리고, 당신의 목숨까지 버리시려고 하십니까? 수십 만 명의 히브리 동족을 생각해 주십시오. 속으로 기도해도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이해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회유를 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늘 “하던 대로” 위층으로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늘 꿇었던 그 자리에 무릎을 올려놓았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 기도의 자리에서 다니엘은 단 1cm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다니엘은 무슨 기도를 했습니까?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니엘은 상황이 좋아져서 감사했던 것이 아니라 상황이 최악이 되었을 때도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의 감사 기도는 그가 높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의 감사 기도는 늘 죽을 준비를 하면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감사는 성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감사는 좋은 조건, 나아진 환경, 풍요로운 생활, 넘치는 축복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감사는 담대한 믿음과 두려움이 없는 용기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감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020년 한 해 동안 있었던 일들을 몇 번씩 뒤집어 봐도 감사할 일이 많지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해야 하니까 추수감사절 봉투에 헌금을 두툼히 넣어서 드릴까요?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향기로운 감사 예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니엘은 봉투가 아니라 그의 목숨을 감사 예물로 드렸습니다.
감사는 훈련의 열매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감사하는 법을 어렸을 때부터 훈련시킵니다. “누가 무엇을 주면 뭐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지? 그래, ‘감사합니다.’하는 거야. 다시 한번 해봐! 그래, 참 잘했어요. 잊지 말고 기억해야 돼. 알겠지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그렇게 잘하던 감사를 어른이 되면 그들은 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감사가 ‘계산된’ 감사로 뒤집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계산된’ 감사가 아니라 ‘무조건’ 감사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모든 일이 안되어도 감사해야 합니다. 건강해도 감사, 아파도 감사, 성공해도 감사, 실패해도 감사, 잘 되도 감사, 깨져도 감사, 살아도 감사, 죽어도 감사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감사했습니다. 다니엘은 자기에게 있는 지혜를 보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지혜를 주셨던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사자의 밥이 될지라도 결코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다는 믿음만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의 삶을 통해서 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았고, 그가 날마다 어디를 바라보고 살았고, 그가 평생 누구를 위해서 살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경건의 원천이었고, 그의 감사는 바로 그 경건의 훈련에서 나온 결과물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어 ‘범사에’ 감사를 잊어버리고 ‘계산된’ 감사만 붙들고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자는 지조(志操)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어느 해보다도 고된 2020년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지쳐있고, 정신적으로 힘들고, 영적으로도 건조해졌습니다. 그래서 무릎에서 힘이 빠져 일어설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쓰러지려면 주저앉지 말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다니엘처럼. 창문을 닫고 혼자 죽어버릴까 하지 말고,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다니엘처럼. 다니엘에게는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었습니다. 자존심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자신을 반드시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 대신에,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특별히 불신자들 앞에서 하나님을 지켜드리는 신실한 그 분의 종이 되겠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고,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원망하지 말고,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그 어떤 누구에게 무시당하지 않으시도록 하나님을 끝까지 지켜드리는 그 분들의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처럼.
정리합니다. 다니엘에게 최악의 상황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는 그 최악이 최악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최악은 사자의 밥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기도를 중단하는 최악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붙잡으면 최악은 최악이 되지 않습니다. 그 최악은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다니엘의 믿음을 조롱했던 바벨론 사람들의 최후는 사자들의 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최악’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만나게 되면 배우려는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에도 또 하나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성숙해 가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픈 사람이 있고, 태어나서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감사의 자리에서 서로 만나면 그 두 사람에게는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장애도 감사하고, 암도 감사할 뿐입니다. 죽음, 그것은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 가장 멋진 만남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다니엘은 그렇게 감사했던 것입니다.
2020년 추수감사절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게 했습니다. 억지로 감사하지 맙시다. 목사이기에, 장로이기에, 권사이기에, 집사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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