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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갑 선교사 - 11월 20일 은혜의 말씀
우리가 버릴 수 없는 사람들
눅 15:25-32
오늘 본문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자신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그는 그렇게 돌직구를 던졌던 것입니다.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권리를 찾겠다는 것이 아니라, 부자의 관계를 끊고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깊은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도시로 나아가 룰루랄라 살았습니다. 그런데 짜릿했던 그 삶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돼지 밥까지 허겁지겁 먹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아버지를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그의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집을 떠날 때 아들의 발걸음은 힘차고 당당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아들의 발걸음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그의 옷은 구질구질했고, 그의 신발 한 짝은 없었고, 남은 한 짝은 너덜너덜 헤어져있었습니다. 그의 손톱 밑에는 쥐엄 열매 찌꺼기가 깊이 끼어 있었고, 그의 머리카락은 엉켜있었습니다. 누구도 그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몰골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먼 거리에서도 아들을 알아보고 그 아들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아들을 향해서 달려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니라, 아들을 향해서 달려오는 아버지의 앞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향해서 달려오는 아버지를 본 아들은 순간 돌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의 몰골이 너무도 비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손에는 몽둥이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팔을 열고 달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목을 힘껏 끌어안고 입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참으로 극적인 상봉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들은 통곡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 받아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과 신발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큰 잔치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맏아들이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부터 음악 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동생을 위한 잔치임을 알게 된 맏아들은 크게 화를 내며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틀어진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맏아들에게도 아버지는 아버지였습니다. 둘째 아들을 향해서만 달려갔던 아버지가 아니라, 토라진 맏아들에게도 달려와 손을 잡아 주셨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 정말 상처가 됩니다. 저와 제 친구들을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내어주시지 않으셨는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시다니요.”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애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지 않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죽었다가 돌아온 네 동생을 위해서 우리가 함께 기뻐하자.”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도 큰 위로와 축복을 주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였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그렇게 해피엔딩(Happy Ending)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 탕자의 이야기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 달랐습니다. 이 탕자의 이야기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와 달랐습니다. 하나를 택하고, 하나를 버리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구약과 신약이 다른 이유입니다. 그것이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이 다른 이유입니다. 구약의 핵심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핵심 즉 예수님은 하나가 아니라 모두가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맏아들도, 둘째 아들도 아버지께는 소중한 아들들이었습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다 하나님의 자녀였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백 마리 양 중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비유, 열 개 드라크마 중에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 두 아들 중에서 잃어버린 한 아들을 찾는 비유였습니다. 그 비유들을 주신 예수님의 의도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세 비유들을 받았던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3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가리켰습니다. 그들이 먼저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1-2절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그 수군거리는 말을 들은 주님께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며 그들의 입을 틀어막아 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사람을 항상 두 패로 분류했습니다. 정(淨)한 사람과 부정(不淨)한 사람. 부정한 사람은 의인이 될 수 없고, 성전 예배에 참여할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존재로 정죄했습니다. 그들은 그 부정한 사람들을 한 그룹으로 묶어서 [죄인]으로 낙인을 찍고, 그들을 따로 분류해서 “따옴표”로 묶어서 저주 아래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1절과 2절의 말씀 중 앞에 나오는 죄인들(“Sinners”)과 뒤에 나오는 죄인(sinners)은 달랐습니다. 앞에 있는 죄인들은 따옴표가 있고, 뒤에 있는 죄인은 따옴표가 없었습니다. 영어 성경은 NIV는 그것을 이렇게 구별해서 번역했습니다. “Now the tax collectors and "sinners" were all gathering around to hear him. But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muttered, "This man welcomes sinners and eats with them.” 앞에 있는 “따옴표” 죄인은 저주 아래 묶인 [죄인의 그룹]을 가리켰습니다. 예를 들면, 한센인, 창녀, 장애인들이 그 죄인의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 역시 동일한 죄인(“Sinners”)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라고 말한 의미는 예수님 역시 상종할 수 없는 “죄인들” 중 한 사람으로 취급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유대교적 전통과 정죄를 깨고 죄인(“Sinner”)의 상징이었던 세리(tax collector) 마태를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선택하셨고, 유대인들이 버린 한센인들과 장애인들을 고쳐주셨고, 간음했던 여인도 구원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행보는 파격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의 질서를 파괴하는 이단의 괴수(魁道)였던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세 비유를 통해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한 영혼이 아버지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특별히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 생각과 잘못된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 짓이 되는지 일깨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 속에 유대인들이 가장 터부시(禁忌)하는 두 단어를 넣으셨습니다. “죄인”(18절, 21절)과 “창녀”(30절)라는 단어였습니다. 앞에서 말한대로 유대인들은 그 죄인과 창녀를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저주 받은 자들로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의인으로 분류하여 죄인들과 같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하나님께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눅 18장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눅 18:9-14)를 통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의 착각과 교만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리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 18:14)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았던 사람들은 스스로 의인이라 자부했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바리새인이 죄인으로 정죄해서 버렸던 세리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누가복음 15장, 16장, 17장, 18장, 19장을 넓게 펼쳐서 보겠습니다. 15장에는 잃은 양의 비유, 한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가 있고, 16장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있고, 17장에는 열 명의 한센인을 치료해 주시는 이야기가 있고, 18장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있고, 19장에는 세리 삭개오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즉 한 두 번이 아니라, 15장에서 19장까지 무려 다섯 번 연속적으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셨습니다. 과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꿨을까요? 그들은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경고를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종교적 규정으로 정(淨)한 사람, 부정(不淨)한 사람으로 갈라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혈통이나 민족으로 사람들을 찢어놓지 않으셨습니다. 선민백성은 결코 죄인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한센인, 세리들은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민족이든, 그가 누구든, 그가 어떤 죄를 범했든 그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마 11:19) 되어 주셨고, 그들의 구주가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정죄한 후에 가지치기 하듯이 그들을 유대사회에서 잘라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버린 그 사람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가장 작은 소자 하나도 등불을 켜고 끝까지 찾아내셨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는 끝까지 기다리셨고, 삐진 아들의 손도 잡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장자(長子)가 아니라 둘째 아들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후에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서기관들처럼, 맏아들처럼 된다면 큰 일입니다. 그들처럼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그들을 내 영역에서 끊어낸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미워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우리의 손에 의해서 “죄인”으로 잘려나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가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설령 어떤 사람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인내를 다 베풀고 "이제는 끝이다."라고 말할지라도, 아버지께서 하실 일이 그에게 남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손으로 누군가를 끊어내지 말고, 하나님께 그를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새 사람 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세 비유의 공통점은 모두 잃었지만, 그 모두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내어 아버지의 기쁨이 되게 했던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처럼 해피엔딩을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삶도 그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끊어내고, 저버리는 심판자가 아니라, 누군가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 용서하고, 또 품어주는 축복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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