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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갑 선교사 - 11월 25일 은혜의 말씀
풀 먹는 소
시 106:19-20
출애굽 이후 석 달 만에 벌어진 참극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가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산 아래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아론에게 몰려가 자신들을 인도할 신(神)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요구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의견 제시가 아니라,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아론을 죽이겠다는 협박에 가까왔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론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금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내와 자녀들이 가지고 있던 금 장식품들을 빼서 가지고 왔습니다. 아론은 그 금들을 녹여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보라. 이것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신이다.”(출 32:4) 아론은 한 술 더 떠, 다음 날 금송아지 앞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경배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환호했습니다. 아론의 영성과 리더십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자연, 동물, 우주에 있는 것들을 신으로 섬기는 다신교(多神敎)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태양, 달, 별, 사자, 늑대, 코브라,
다음 날, 아론은 금송아지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백성들은 먹고, 마시며, 난잡하게 놀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지금 내려가라. 네 백성이 내 명령을 저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고 있다. 그들은 그 금송아지를 보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출 32:8)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계셨고, 모든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모세가 하산하여 이스라엘 진영 가까이에서 금송아지 앞에서 난잡하게 춤추는 자들을 보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두 돌 판을 그들을 향해서 힘차게 내던졌습니다. 돌 판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불에 태웠고, 입힌 금은 갈아서 물에 타 춤춘 자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그래도 모세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위 사람들을 불러 금송아지와 연루된 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날 죽임을 당한 자들이 3,000명이었습니다.
미얀마를 흔히 [황금의 나라]라고 합니다. 미얀마 전국에는 불탑(파고다)이 약 400만개가 있습니다. 그 불탑들의 색이 모두 황금색입니다. 그래서 황금의 나라라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400만개 불탑들 중에서 최고의 불탑은 양곤에 있는 쉐다곤(Shwedagon) 파고다입니다. 높이가 99m
그때 그 일을 시편 106편 시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시편 106:19-20절입니다.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이 말씀에서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다.”는 말씀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자기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신 권능을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그런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을 때, 이집트 신들이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것을 그들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특별히 아홉 번째 재앙은 흑암의 재앙이었는데, 이집트 최고의 신인 태양신 라(Ra)가 힘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온 천지가 어둡게 되는 것을 그들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홍해를 건너기 전에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세워 이집트 전차 부대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다를 열어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신 것을 보았고,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만들어 주셔서 그 물을 마셨고, 식량이 떨어졌을 때는 날마다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매일 매일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시인은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그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꿀 수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짐승들 중 하나입니까? 하나님이 풀 먹는 소입니까?
그들은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요? 어리석었던 영적 지도자 때문이었습니다. 무지하고, 무식했던 백성은 뒤로 하고, 아론의 엉터리 리더십이 그런 참람한 사건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그 점을 모세는 간과하지 않고 아론을 질타했습니다. 출 32:21절입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아론의 변명은 너무도 유치했었습니다. 출 32:24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마치 마술과 같은 사건이었다고 변명한 것입니다. 불 속에 금을 던졌더니 “펑”하면서 금송아지가 튀어나왔다고 했습니다. 히브리 원어 역시 ‘밖으로 나왔다.’는 단어로 ‘와이예세(וַיֵּצֵ֖א): came out’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아론의 구차한 변명은 받아드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론은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모세는 최종적으로 아론에게 말했습니다. 출 32:25절입니다.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백성들이 그처럼 난잡하게 된 것이 아론 때문이었다고 명백히 말했던 것입니다. 아론은 입이 열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금송아지 사건을 최종 판결하셨던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출 32:3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말씀에서도 분명하게 밝혀졌던 진실은 금송아지를 만든 자는 아론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3,000명을 죽인 것으로 끝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염병으로 나머지 백성들도 벌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게 진노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오만과 리더의 리더십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런 비극적인 끝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호렙산 위를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계셨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출 20:3-4) 산 위에서 그런 말씀이 선포될 때, 산 아래에서는 아론과 정신 나간 사람들은 하나님을 소로 둔갑시키고 있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공백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없다는 것이 아론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치 않더라도 갑자기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어린 소녀가 졸지에 소녀 가장이 됩니다. 든든했던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아내가 가정을 책임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직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전도사가 한 교회 목회를 책임지는 리더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아론처럼 엉성하고, 나약하고, 엉뚱한 일을 벌이는 리더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아론에게 배우는 또 다른 교훈은 끌려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론은 백성을 이끌고 가는 리더였습니다. 그런데 아론은 그들에게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위협적인 협박을 했다 할지라도 허락해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허락해 줄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협박 때문에 지켜야 할 원칙에서 왔다 갔다 한다면 리더는 리더십을 잃고 맙니다. 아이들의 협박성 요구를 이기지 못해 부모들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준다면 그 아이들에게 끌려가는 부모가 될 것입니다. 나는 개방형 교육과 민주주의 환경에서 아이들을 억압하지 않고 키우겠다는 열린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모의 넓은 배려가 영적 리더십 상실로 이어진다면 아론처럼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어떨 때는 모세와 같은 [분노 리더십]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바꿔도 바뀔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자유시대, 개성시대가 되어도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닌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시편의 시인이 말한 “풀 먹는 소”입니다. 소는 소일뿐이라는 뜻입니다. 소는 짐승입니다. 그 “풀 먹는 소”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둔갑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닌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엉뚱한 것들이 올라가 춤을 추게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누구도 우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선 것은 다 우상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 땅, 산 아래에서 살고 있지만 산 아래 사람들처럼 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항상 그리고 언제든지 높은 산 위 즉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광이 “풀 먹는 소”로 바뀌게 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소(牛)는 소(牛)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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