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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갑 선교사 - 12월 10일 은혜의 말씀
작은 한 조각이 되어
시 105:9-20
인간은 하나님의 광대하신 계획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우는 계획은 고작 10년, 20년 혹은 50년을 내다보며 세우는 플랜(Plan)들입니다. 100살을 넘길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100년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시기에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을 내다보시며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은 원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05편은 길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시편도 수백 년의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광야 40년까지 약 4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그 한 장(章)에 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족장시대로 시작해서 이스라엘이란 한 국가를 세우는 초대 히브리 민족사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장엄한 역사를 기획하시고, 그 역사를 이끌어 가셨던 분이 하나님이라고 시편의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아홉 번 만나주셨습니다. 그 만남들 중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세 번(창 12장, 15장, 17장)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첫 번째 언약은 75세 때, 두 번째 언약은 85세 때, 세 번째 언약은 99세 때 맺으셨습니다. 첫 번째 언약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두 번째 언약은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네 자손이 400년 동안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다가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 세 번째 언약은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였습니다. 그 언약들은 모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맺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언약하신대로 사라의 태를 열어 이삭을 낳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하나님은 400년이란 긴 일정을 정하시고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거대한 플랜을 성취시킬 수 있는 한 사람을 택하셨는데 그가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요셉이었습니다. (시 105: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5) 그 하나님의 이름 속에 요셉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언약과 깊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었지만, 요셉과는 맺지 않으셨습니다. 즉 요셉은 언약을 받는 자가 아니라, 그 언약들을 성취할 일군으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요셉의 생애를 매우 비중 있게 다루었습니다.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가 있었지만,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라헬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아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렀을 때, 라헬의 태를 열어 요셉을 낳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열 두 아들들 중에서 라헬의 소생이었던 요셉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그 이유 때문에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고, 급기야 요셉을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렸습니다. 노예가 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덮은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습니다. 그런데 애굽 왕의 꿈을 해석함으로써 요셉은 졸지에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아니라, 국무총리가 된 이후에 요셉이 행한 일에 주목했습니다. 요셉은 그의 가족을 애굽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70명의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이주했습니다. 그 대목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이 보이십니까? 시편의 시인은 요셉의 이야기를 꺼낼 때 숫자 즉 인구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시인은 족장 시대 때는 “사람의 수가 적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시 105:12) 그런데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크게 번성하게 하사 애굽인 보다 더 강하게 하셨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시 105:23-24) 그리고 105편 후반부는 출애굽 사건을 극적으로 다루었습니다. 그 기록들을 인구통계학적으로 보면 70명이 짧은 기간 안에 200만 명이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400년 후에 그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어 애굽에서 나오게 되리라는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105편에는 이런 가정도 있었습니다. 만약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하지 않고 가나안에 계속 거주했다면 주변 부족들과의 잦은 전쟁으로 인해서 인구 증가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의 사람 수가 적어 그 땅의 나그네가 되었고,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떠돌아다녔도다.”(시 105:12-13)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을 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당시 애굽은 세계 최강 국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애굽으로 보낸다면, 그들이 비록 노예는 되겠지만 강대국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에 타 부족들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고, 그런 사회 안전망 속에서 인구를 급속히 번성시킬 수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확정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플랜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봉대장으로 뽑아 애굽으로 잠입시켰던 제1호 용병(勇兵)이 바로 요셉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시 105:17)
그처럼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면 요셉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왜 그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야만 했었는지, 왜 그가 애굽으로 팔려가야만 했었는지, 왜 그가 군대장관 보디발의 집으로 가야만 했었는지, 왜 그가 보디발의 아내에게 배신을 당하고 투옥되어야만 했었는지, 왜 그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줘야만 했었는지, 왜 하나님께서 애굽 술사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바로의 꿈을 풀 수 없도록 하셨는지? 등등....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은 요셉의 발에 차꼬가 채워지고, 그의 몸이 쇠사슬로 묶이게 된 것이 모두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 위해서 한 사람의 희생과 헌신은 그처럼 필연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약 20년 전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러시아 정교회 이삭(St, Isaac) 성당을 가보았습니다. 약 200년 전(1818년-1858년)에 40년 동안 건축한 웅장한 성당이었습니다. 성당의 동서남북 정문에는 각각 12개씩 모두 48개 기둥이 서있었습니다. 핀란드에서 가져 왔다는 붉은 색 화강암이었는데 짧게 잘라서 붙여 쌓아 올린 기둥이 아니라 원석 하나를 통째로 깎아서 만든 거대한 기둥이었습니다. 기둥 하나의 무게가 125톤이라고 했습니다. 성당 내부는 천장, 벽, 바닥까지 화려한 성화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습니다. 성화 앞으로 가까이 갔을 때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감으로 그려진 성화가 아니라, 돌을 박아서 만든 모자이크 성화들이었습니다. 돌 위에 물감을 칠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색을 품은 원석들을 가지고 그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성화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성당의 높이는 약 100m, 수용 인원은 14,000명이라고 했습니다. 작품에 박힌 돌들을 센다면 수십 억 개가 넘을 것입니다.
1미터 앞에서 보면 성화의 전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작은 돌들만 눈에 들어옵니다. 새끼손톱만한 작은 한 조각이 [나]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땅에 버려져 있을 때는 그냥 돌이었지만, 성화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작은 조각은 한 작품을 완성해 주는 소중한 보석이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주인공이 되기 원하는 유혹과 욕망이 있습니다. 남들 위에서 더 돋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자이크 속에 있는 돌 한 조각, 한 조각은 결코 ‘혼자’ 돋보이려는 조각들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돌들이 큰 그림 속으로 들어가 숨을 때 아름다운 ‘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그렇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제 눈에는 요셉의 생애가 그런 한 조각으로 보였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내 이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이다.”라고 그의 이름까지 넣어주시는 영광을 그에게는 주시지 않으셨지만,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의 언약, 이삭의 언약, 야곱의 언약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언약 성취]라는 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소중한 한 조각으로 사용하셨던 요셉의 생애가 저에게는 더 큰 감동으로 밀려왔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요셉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 목회에도 차꼬가 채워졌고, 성도들의 사업에도 차꼬가 채워졌고, 선교지로 돌아갈 수 없도록 선교사의 발도 쇠사슬에 묶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 그 모든 결박이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행해지는 일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오늘 본문 19절과 20절은 모든 것을 묶으시고, 푸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9-20절 말씀입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셨도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처분을 내리시든, 하나님께서 우리의 남은 삶을 어떤 상황 속으로 던지시든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지켜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있으라”하신 그 자리에 “있는” 한 조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 성취를 위해서 애굽으로 보냈던 제1호 용병(勇兵) 요셉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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