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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갑 선교사 - 8월 5일 은혜의 말씀
영광을 위한 시련 시편 23:1-6
시편 23편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깊은 영감과 위로와 용기와 승리를 줍니다. 크리스천들이 암송하는 성경 구절들 중에서 시편 23편은 탑(Top) 7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역시 시편 23편을 6회로 나눠서 강해 설교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강해 설교뿐만 아니라 시편 23편을 본문으로 삼아 여러 번 다른 주제 설교도 했었습니다. 그처럼 시편 23편은 읽을 때마다 색다른 영감으로 우리들에게 다양한 메시지를 줍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영혼을 살려주시고,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길에서도 나와 동행해 주시고, 위험에 처했을 때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지켜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원수 앞에서 나를 높여주시니 감사하고, 내가 사는 날 동안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항상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을 떠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1000번을 읽어도 은혜가 넘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 늘 시편 23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23편 ‘안’에 있는 은혜의 삶보다, 시편 23편 ‘밖’에 있는 시련의 삶이 더 많을 때가 있습니다. 한 순간에 목자를 잃은 가엾은 양이 되어 버립니다. 한 순간에 무서운 병을 얻어 시들은 풀과 같이 되고, 말라버린 시냇가처럼 되어 버립니다. 한 순간에 잘 풀리던 일들이 사망의 골짜기로 떨어집니다. 평상시에 늘 함께 했던 이들이 한 순간에 적으로 돌변해 버립니다. 우리 곁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을 우리는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또 다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시편 23편 [안]에 있는 세계보다 [밖]에 있는 세계에 대해서 좀 더 주목을 해보려고 합니다. 시편 23편 [안]에 푸른 초장이 있었다면, 시편 23편 [밖]에는 힘든 광야가 있었습니다. 왼쪽에 있는 시편 22편은 그 힘든 광야의 세계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 22:1-2)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시 22:11)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샀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 22:14-16)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면 은혜의 23편도 있었고, 시련의 22편도 있었습니다. 마치 밀물 썰물처럼 은혜가 밀려왔다가 나가고, 시련이 밀려왔다가 나가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23편 [밖]에는 고통의 세계만 있지 않았습니다. 오른 쪽 시편 24편에는 영광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시 24:7-10) 아멘!
그러므로 시편 22편, 23편, 24편을 하나하나 떼어내지 말고 함께 붙여서 보면 한 편의 대(大) 서사시(敍事詩)가 눈에 들어옵니다. 시편 22편은 [고난의 역사], 시편 23편은 [승리의 역사], 시편 24편은 [영광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거기에서 높이 들어나게 됩니다.
시편 22편에는 예수님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1)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삐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7-8)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2)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6)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18)” 시편 23편에는 예수님의 승리가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나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내시고,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고, 내 잔을 넘치나이다.” 시편 24편에는 사망을 이기시고,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던 예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그렇게 세 편의 시편들을 나란히 이어놓고 보면 이런 메시지가 나옵니다. 고난이(시편 22편) 없는 이에게는 승리의(시편 23편) 면류관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만 영광이(시편 24편) 주어진다는 메시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그 고난과 승리와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진 환란과 핍박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하면서 기도하며, 찬송 부르며, 영광을 바라보며 순교의 장으로 담대히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편 23편만 좋아한다면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엇! 이건 뭐지? 여호와는 나를 지켜주시는 목자라 하셨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숙해져야 합니다. 생각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제는 시편 23편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빠른 걸음으로 시편 22편으로 내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내려가는 일을 잘 했던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바울은 고난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오히려 기뻐하며,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바울이 언급했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예수님께서 끝내지 못했던 어떤 미완성 작업, 어떤 미진했던 작업을 자신이 완성시키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예수의 복음을 위하여 지고 가야만 하는 [십자가의 고난]을 의미했습니다. 복음을 땅끝가지 전하는 사도로서 모든 고난을 기꺼이 기쁨으로 받아드리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가 받을 영광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시편 23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왼쪽을 보면, 오른쪽을 보면 다른 세계가 있었습니다. 왼쪽에는 고통스러운 시편 22편이 있습니다. 만약 거기에서 우리의 생애가 끝난다면 너무 슬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른편 영광의 시편 24편이 있었습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찬란하고, 얼마나 거룩하고,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아는 사람은 시편 23편에 머무르는 것보다 더 빨리 시편 22편으로 내려가 고난의 십자가를 지려할 것입니다. 그것이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깊은 빌립보 감옥 안에서 밤새 기도하고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 (로마서 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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