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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갑 선교사 - 9월 27일 은혜의 말씀
하나님께 나는?
요 1:43-51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 가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검정색 정장을 입고 기도하는 정통(Orthodox) 유대인 남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을 자세히 보면 모든 남자들이 똑같은 물건 세 가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키파(Kippah), 테필린(
키파는 머리에 쓰는 모자입니다. 하늘에 머리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쓰는데, 하나님께 경외심을 표시합니다.
테필린은 양피지에 손으로 쓴 성구 두루마리를 넣은 작은 검은색 상자(Batim)입니다. 그 상자는 네 칸으로 되어 있는데, 각 칸에는 네 개의 성구가 각각 들어가 있습니다. 출 13:1-10, 출 13:11-16, 신
탈릿은 하얀 천으로 만든 기도 보(褓)입니다. 어깨를 덮고 있다가 기도를 할 때는 탈릿으로 머리를 덮습니다. 자신의 몸을 구별시켜서 오직 기도에만 집중하겠다는 표시입니다.
키파, 테필린, 탈릿은 그처럼 각각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이 세 개를 모두 갖추고 서 있으면 한 가지 메시지를 줍니다. [나는 이스라엘,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 백성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오늘은 그런 정통(Orthodox) 유대인들의 모습을 머리에 그려 놓고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안드레와 베드로를 부르신 후에 빌립도 부르셨습니다. 빌립은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메시야를 만났다는 사실이 더 기뻐서 곧장 친구 나다나엘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나다나엘, 나다나엘,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이 말씀하셨던 그 메시야를 내가 오늘 만났어. 오! 하나님,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메시야라고? 누군데? 어디서?” “응, 요셉의 아들이고, 나사렛에서 온 예수라는 분이야.” “뭐라고?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나사렛 같은 산골에서 무슨 메시야가 나와! 빌립, 정신 차려!” “아니야. 네가 직접 그 분을 만나면 너도 기절할거야.”
그래서 나다나엘은 빌립의 간청으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함께 갔습니다. 그곳에는 베드로와 안드레도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오는 나다나엘을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베드로와 안드레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들의 눈에도 나다나엘이 착하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기쁘게 받아주셔서 빌립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다나엘의 얼굴은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저를 아십니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노라.” 그때 베드로와 안드레가 깜짝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빌립이 떠난 이후에 지금까지 저희와 함께 이곳에 계셨지 않습니까?” 그러자 나다나엘이 말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도 보리라.” 그렇게 해서 나다나엘이 열 두 제자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먼저 걸러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나다나엘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나다나엘의 도덕적 결함이 없는 삶이 아닙니다.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순진한 사람 혹은 남에게 그 어떤 폐도 끼치지 않는 착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선택하실 때 그처럼 도덕적 기준을 고려하셨다는 것입니까? 나다나엘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완전한 사람이었습니까?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참] 이스라엘 사람을 어떤 기준에서 뽑으셨던 것입니까? 키파(Kippah)를 쓰고, 테필린(Tefillin)을 매고, 탈릿(Tallit)을 덮고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의 전통을 지키는 그들이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네거리와 넓은 광장에 서서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됨을 알리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속을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보셨던 것은 나다나엘의 [속]이었습니다. 그가 입은 옷도 아니었고, 그가 갖추고 있는 장식구들도 아니었고, 그가 율법을 성실히 지킨 행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간사함이 없었던 나다나엘이 아니라, 나다나엘을 너그럽게 봐주셨던 예수님의 은혜와 용납하심을 주목해야 합니다. 나다나엘의 속 마음까지 아셨던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했던 말들을 모르실 리가 없으셨습니다. “요셉의 아들이 메시야라고? 아이구~~ 나사렛 사람이 메시야라고? 아이구~~ 빌립, 정신 차려!” 그는 도덕적으로 거짓말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순진한 사람이었을지는 몰라도,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고 대뜸 무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거짓말보다 더 무거운 불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그를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증해 주셨던 것은 그에게 베푸신 주님의 한없는 은혜와 용납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우리가 잘 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공로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순댓국을 좋아합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저의 집에는 큰 밭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넓은 밭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8일장이 서는 날에는 밭으로 가지 않고, 장터로 나가셨습니다. 장날이 되면 어머니는 새벽부터 절편과 술떡을 만들어 장터로 가지고 가서 파셨습니다. 장터에는 저희 가게가 없었기 때문에 땅바닥에 떡 그릇을 놓고 파셨는데, 그 장소가 바로 순댓국 집 앞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날마다 어머니를 따라서 가면, 어머니는 항상 순댓국 한 그릇을 사주셨는데, 그 순댓국 맛을 제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순댓국을 잘한다는 집에 가서 먹고 내리는 평가는 항상 내 고향 장터 순댓국을 그 기준으로 해서 내립니다. 아니다 싶으면 다시는 그 집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고향 순댓국 맛에 가깝다 싶으면 또 가고,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도 합니다. 누구에게 인증(認證)을 받는 일은 그처럼 중요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께 인증을 받고, 진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기준(基準)이 된다면 그것처럼 큰 영광은 없을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그런 인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도, 지금도,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십니다. 하나님께 나는 누구일까? 나는 하나님의 눈에 띄는 사람일까? 나는 하나님께 빛일까? 나는 하나님께 별일까? 나는 하나님께 기쁨일까? 하나님께 나는 누구일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와 함께 갈릴리에 계셨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더 먼 곳까지 살펴보시고 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눈에 빛처럼, 별처럼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속까지 살펴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웃으시며 그에게 이런 인증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아레소스(ἀληθῶς)” 무슨 뜻일까요? 오늘 본문 47절에 나오는 [참]이란 헬라어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는 누구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찾으셨던, 예수님이 찾으셨던 그 [참] “아레소스(ἀληθῶς)”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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